미국 헬스케어 시장이 비만 치료제라는 거대한 물결과 AI라는 새로운 혁신의 교차로에서 요동치고 있다. 블록버스터급 신약의 주도권 다툼부터 기민한 스타트업과의 합종연횡까지, 현재 바이오파마 업계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단연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다.
지난 목요일, 미국 최대 처방약 급여 관리업체(PBM) 중 하나인 CVS 케어마크(CVS Caremark)는 일라이 릴리(Eli Lilly)의 체중 감량 주사제 ‘젭바운드(Zepbound)’에 대한 보험 적용을 복원하고, 최근 출시된 경구용 치료제 ‘파운데이오(Foundayo)’를 수천만 명이 이용하는 표준 상업용 처방집(formulary)에 추가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비만 치료제 시장에서 노보 노디스크(Novo Nordisk)와의 격차를 벌리려는 릴리의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CVS는 노보 노디스크의 GLP-1 경쟁 약물인 위고비(Wegovy)만을 선호 치료제로 지정하며 젭바운드를 처방집에서 배제하는 강수를 뒀다. 하지만 6월 1일을 기점으로 지난 4월 승인된 릴리의 1일 1회 복용 경구용 GLP-1 약물인 파운데이오에 대한 시장 진입 차단이 해제된다. 뒤이어 10월 1일에는 젭바운드가 템플릿 플랜 전반에 걸쳐 추가적인 선호 옵션으로 화려하게 복귀할 예정이다.
혜택은 환자들에게 직결된다. 상업용 보험 가입자들은 월 25달러라는 파격적인 본인 부담금으로 릴리의 약을 처방받을 수 있으며, 메디케어 파트 D 가입자들 역시 7월부터 가동되는 ‘GLP-1 브릿지’ 프로그램을 통해 월 50달러 수준의 혜택을 누릴 길이 열렸다. 이번 결정으로 릴리의 비만 치료제 포트폴리오 전체가 미국 3대 PBM 모두의 보장 망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물론 노보 노디스크 측도 위고비의 주사제 및 알약 버전이 CVS 처방집에서 선호 지위를 유지하게 된 것에 안도하며, 기존 환자들이 중단 없이 약을 복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약 2,500만에서 3,000만 명의 미국인을 커버하는 거대 PBM 시장에서 양대 산맥이 다시 팽팽한 균형추를 맞추게 된 셈이다.
CVS는 이러한 급여 체계 개편이 비만 관리 부문의 비용 곡선을 꺾기 위한 뼈를 깎는 협상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급변하는 GLP-1 파이프라인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여 제약사들의 약가 인하를 압박해 낸 것이다. 다만 템플릿 처방집을 채택하는 개별 플랜 스폰서들이 최종 보장 여부에 대한 재량권을 쥐고 있어, 이것이 곧장 모든 환자의 무조건적인 접근성 확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구조적 한계도 존재한다.
기술 통합의 벽: 거대 제약사와 혁신 스타트업의 동상이몽
CVS가 파이프라인의 폭발적인 진화에 대처하기 위해 비용 효율의 묘수를 짜내고 있다면, 덩치가 큰 제약사들은 신약 개발과 임상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AI 스타트업 생태계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최근 보스턴에서 열린 첫 ‘팜스타즈 팜테크 이노베이션 서밋(PharmStars Pharmtech Innovation Summit)’에서는 제약사와 스타트업이 테이블을 마주했을 때 벌어지는 지독한 현실과 뼈저린 교훈들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나왔다.
업계 전문가들은 AI 솔루션의 성공이 그저 ‘작동하는 기술’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기술을 밀어붙일 내부의 챔피언, 정확한 KPI, 그리고 파일럿에서 전면 도입으로 넘어가는 데스밸리를 건널 전략이 필수적이다.
스타트업이 제약업계에 뛰어들 때 겪는 착각들
다케다(Takeda)의 스테파니 클록(Stephanie Klock)은 스타트업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지적했다. “스타트업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들고 오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제약사는 심도 있는 과학적 지식과 상업화 역량을 갖춘 거대 조직입니다. ‘내 기술이 완벽하니 이대로 쓰라’가 아니라, 양측의 강점을 어떻게 융합할지 고민하는 공동 창조(co-create)의 마인드가 필요합니다.”
퓨전 펀드(Fusion Fund)의 루 장(Lu Zhang) 역시 순수 AI 백그라운드만 가진 젊은 창업자들에게 제약 시장의 복잡성을 경고한다. 미국 GDP의 20%를 차지하는 엄청난 시장이지만, 그 속내는 소름 돋게 얽혀 있다. 알렉시온(Alexion)의 타이비 쿠라이시(Taibi Quraishi)는 “제약 시장은 구매자와 사용자가 다르고, 사용자와 의사결정권자가 다르다”며, 스타트업이 풀고 있는 건 기술의 결함이 아니라 복잡한 보상 구조(incentive problem)라는 점을 꼬집었다.
사노피(Sanofi)의 일란 와핀스키(Ilan Wapinski)의 말은 더 단호하다. 기술 자체의 우수성은 전체 성공 요인의 3분의 1도 되지 않으며, 진짜 중요한 것은 ‘기존 사노피의 시스템과 얼마나 매끄럽게 통합될 수 있는가’이다.
CSL의 조나단 월시(Jonathan Walsh)는 스타트업의 포장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대형 제약사는 애초에 정해진 답이 없는 혁신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초기 단계의 기업을 찾는다. 그런데 많은 스타트업들이 스스로를 이미 완성된 거대 기업처럼 보이려 ‘허세’를 부리며 소통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제약사가 놓치고 있는 스타트업의 속도감
반대로 제약사는 스타트업을 대할 때 무엇을 알아야 할까. 에토스(Ethos)의 공동 창업자 사샤 세이모어(Sasha Seymore)는 차라리 깐깐한 가이드라인을 주는 곳이 일하기 편하다고 말한다. 자체적인 AI 인프라를 구축해 두고 “우리 시스템에 맞춰서 연동해 달라”고 명확히 요구하는 제약사가, 비전도 없이 진공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는 곳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제약사들은 스타트업의 타임라인을 이해하는 유연성이 절실하다. 픽처 헬스(Picture Health)의 트리샨 아룰(Trishan Arul) CEO는 임상시험에 빨리 기술을 투입하자고 제약사 측에서 서둘러 놓고선, 정작 기본 거래 계약(MSA)을 체결하는 행정 처리에만 1년이 넘게 걸렸던 씁쓸한 경험을 공유했다.
비만 치료제 시장의 치열한 샅바싸움이든, AI 혁신을 둘러싼 제약사와 스타트업의 동상이몽이든 결국 본질은 하나로 통한다. 비대하고 보수적인 헬스케어 생태계가 시장의 폭발적인 변화 속도를 어떻게 소화해 낼 것인가. 혁신의 과실은 기술의 우수성 자체보다 그것을 시장의 톱니바퀴에 얼마나 매끄럽게 맞물리게 하느냐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