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거시경제와 지정학적 지형도가 묘한 변곡점을 맞고 있다. 미국과 이란 간의 잠정적인 휴전 합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간 시장을 짓누르던 지정학적 리스크가 한풀 꺾이는 모양새다. 글로벌 물동량의 대동맥인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 기대감이 커지며 국제 유가는 배럴당 80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브렌트유는 전날 5% 넘게 급락한 뒤 0.1% 오른 79.05달러 선에서 안정을 찾으려 하고 있고, WTI 역시 76.02달러 부근에 머물며 전쟁 발발 이전인 2월 말 수준(70달러대)을 향해 가고 있다.
물론 원유 공급 정상화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릴 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HSBC 이코노미스트들의 말마따나 기뢰 제거부터 보험 복구, 유휴 생산 시설 재가동에 이르기까지 현장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고, 합의안에 이스라엘의 레바논 철수 조건이 포함될지 여부도 뇌관으로 남아있다.
연준의 셈법과 월가의 ‘AI 거품론’ 경계감
이런 와중에 시장의 눈은 케빈 워시(Kevin Warsh) 신임 의장 체제에서 처음 열리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정책 회의로 쏠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금리 인하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지만, 연준이 쉽사리 백기를 들지는 않을 전망이다. 전쟁 여파로 인한 인플레이션 재발 우려 탓에 당분간은 현재 금리 수준을 꽉 쥐고 관망할 가능성이 높다. 모닝스타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프레스턴 콜드웰은 “에너지 가격 충격만 걷히면 임금과 임대료 상승 둔화 덕에 인플레이션은 크게 꺾일 것”이라면서도 “2026년 연내 금리 인상은 없겠지만, 인하 사이클은 2027년에나 재개될 것”으로 내다봤다.
뉴욕 증시도 다소 어수선하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0.6% 오르며 또다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해 선방했지만, AI 거품론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은 1.2% 주저앉은 26,376.34로 마감했다. S&P 500 역시 0.6% 하락했다. 특히 엔비디아(-2.4%), 브로드컴(-4.4%), 마이크론(-6.2%) 등 내로라하는 반도체 대장주들이 줄줄이 미끄러지며 시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반면, 개별 이슈가 있는 종목들은 쏠쏠한 재미를 봤다.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는 월가 데뷔 이후 사흘 연속 질주하며 4.8% 뛰었고, 얌 브랜즈(Yum Brands)는 사모펀드 롱레인지 캐피탈 주도의 컨소시엄에 피자헛을 27억 달러를 받고 통매각한다는 소식에 1.9% 상승했다. 외환 시장에서는 달러-엔 환율이 160.42엔에서 160.15엔으로 하락했고, 유로화는 1.1608달러에서 1.1601달러로 소폭 내렸다.
아시아 증시의 맷집, 그리고 질주하는 코스피
월가의 흔들림이나 다소 미적지근했던 유럽 시장(영국 FTSE 100 -0.2%, 독일 DAX -0.3%, 프랑스 CAC 40 +0.2%)과 달리, 아시아 증시 특히 한국과 일본 시장의 맷집은 꽤나 인상적이다.
월가의 AI 투매 장세에도 불구하고 코스피는 보란 듯이 1.6% 급등하며 8,864.24로 역대 최고점을 갈아치웠다. 국내 증시를 견인한 건 단연 기술주 투톱의 저력이다. 시가총액 1위 삼성전자가 1% 올랐고, SK하이닉스는 무려 5.8% 폭등하며 글로벌 시장의 훈풍을 고스란히 빨아들였다.
이웃 나라 일본 역시 하이테크 수요에 힘입어 5월 수출이 전년 대비 17%나 뛰면서 닛케이 225 지수가 장중 7만 선(70,125.75)을 터치한 뒤 69,902.25(+0.7%)로 거래를 마쳤다. 홍콩 항셍지수(-0.7%, 24,312.16)를 제외하면 상하이 종합지수(+0.4%, 4,108.08), 호주 S&P/ASX 200(+0.5%, 8,966.30), 대만 가권지수(+0.2%), 인도 센섹스(+0.3%) 등 아태지역 전반이 뚜렷한 상승 기류를 탔다.
한은의 노림수: 원·위안 직거래망으로 촘촘히 다지는 방어막
이처럼 통화 정책의 불확실성과 지정학적 파고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대외 환경 속에서, 한국 당국은 나름의 생존 공식과 실질적인 펀더멘털 방어에 나선 모양새다. 달러 패권의 틈새에서 달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한국은행의 행보가 대표적이다.
한은은 내년(2026년) 원·위안 직거래 시장을 이끌어갈 12개 시장조성은행(국내은행 7곳, 외은지점 5곳)을 선정해 발표했다. 달러 환전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은행 간, 그리고 고객 간 현물환 거래가 가능하게끔 유동성을 공급할 핵심 플레이어들이다. 국내 은행으로는 국민, 농협, 신한, 우리, 기업, 하나, 산업은행이 든든하게 포진했고, 외국계로는 중국건설은행, 교통은행, 공상은행, 중국은행, 그리고 HSBC가 합류했다.
한은 측은 “그간 시장조성자 제도가 원·위안 직거래 시장의 성공적인 안착에 큰 기여를 해왔다”며, 앞으로도 이들이 위안화 활용도를 높이고 시장 파이를 키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주문했다.
결국 글로벌 자본시장의 복잡다단한 체스판 위에서 한국은 기술적 우위(반도체 중심의 증시 랠리)와 금융 시스템의 체질 개선(환리스크 헤지를 위한 통화 다변화)이라는 투트랙 전략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외부 변수에 이리저리 휘둘리기보다는 실리적인 독자 노선을 다져가는 이 흐름이 2026년 하반기 경제 성적표에 어떤 결과물로 나타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