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의 캔버스 위로 쏟아진 현실과 환상의 서사들

색채의 캔버스 위로 쏟아진 현실과 환상의 서사들

마르크 샤갈. 20세기 미술사를 관통하는 이 거장에게 ‘색채의 마술사’라는 수식어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다. 현재 일산 고양시립아람미술관에서는 그의 예술세계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가 한창이다. 고양문화재단(대표이사 남현)과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대표이사 김대성)가 손을 잡고 기획한 이번 전시는 유화부터 과슈, 오리지널 판화, 아트북에 이르기까지 무려 330여 점의 방대한 컬렉션을 쏟아낸다. 오스트리아의 개인 소장가와 독일 쾰른 부아세레 갤러리의 소장품들로 채워진 이 공간은 흔한 연대기적 구성을 과감히 내던졌다. 대신 ‘사랑을 노래하다’, ‘환상의 세계에서’, ‘신에게 다가가다’, ‘파리, 파리, 파리’, ‘빛과 색채’, ‘영원한 이방인’ 등 6개의 굵직한 테마를 내세워 관객이 직접 작가의 치열했던 삶의 궤적을 좇게 만든다.

특히 1952년부터 1961년까지 10년에 걸쳐 완성한 총 42점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연작 컬러 석판화가 국내 최초로 공개된 점은 전시의 백미다. 고대 그리스 문학 서사 위로 흐르는 몽환적인 색채와 유려한 선은 시각 예술과 텍스트가 절묘하게 융합된 20세기 판화 예술의 정점이다. 고양문화재단 김백기 문화예술본부장의 말처럼,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이 거장의 따뜻하고 깊은 울림이 꽤나 진하게 전해지는 공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전시장을 빠져나와 이 짙은 색채의 잔상에 시달리다 보면 묘하게도 또 다른 이야기의 숲, 즉 문학으로 시선이 옮겨간다는 것이다. 시각적 이미지가 텍스트로 치환되는 경험이랄까. 매주 순수 문학부터 묵직한 논픽션, 스릴러와 로맨스까지 주목할 만한 신간을 날카롭게 큐레이션하는 뉴욕타임스 북리뷰의 최근 리스트들을 들여다보면 샤갈의 테마들이 고스란히 겹쳐 보인다. 샤갈이 캔버스 위에 일상의 애환과 환상을 버무렸다면, 활자로 쓰인 각기 다른 색채의 서사들이 바로 여기 있다.

샤갈이 평생 안고 살았던 ‘영원한 이방인’의 척박한 정서는 논픽션과 전기의 영역에서 묵직하게 변주된다. 수지 한센의 『From Life Itself』는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 이후 터키가 겪어온 난폭한 변화들, 이를테면 무분별한 건설 붐과 쿠르드 지역의 전운, 난민 유입과 가파른 독재화의 바람 속에서 이스탄불의 한 동네 주민들에게 렌즈를 바짝 들이민다.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저자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대끼는 인간 군상의 질감을 치밀하고 다층적으로 잡아낸다. 한편, 현실의 바닥을 치고 화려한 제국을 건설한 메리 케이 애시의 삶은 메리 리사 가베나스의 평전을 통해 펄떡이며 살아난다. 핑크색 캐딜락으로 대변되는 화장품 제국의 아이콘이 되기 전, 세 번의 이혼과 두 번의 사별을 겪으며 힘겹게 생계를 꾸려야 했던 텍사스 가정주부의 파란만장한 서사는 샤갈의 붉은 유화만큼이나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샤갈이 ‘사랑을 노래하다’ 섹션에서 보여준 낭만은 존 랜체스터의 『Look What You Made Me Do』로 넘어오며 꽤 서늘하고 기묘하게 비틀린다. 갓 과부가 된 케이트가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치팅(Cheating)’—50대 남편과 30대 초반 여성의 변태적인 불륜을 다룬—을 보다가 자신의 결혼 생활에 얽힌 내밀한 디테일들을 발견하며 겪는 불안을 그렸다. 평론가 알렉산드라 제이콥스가 “비싼 캐시미어 스카프처럼 독자를 편안하면서도 옥죄어오는 웰메이드 다크 도메스틱 픽션”이라 평한 대로 그 심리적 압박감이 탁월하다. 여기에 애나키어라 스틴슨이 써 내려간, 오싹한 전 연인을 다룬 다크 코미디 심리 스릴러는 한술 더 뜬다. 자칫 흥미 위주로 소비될 수 있는 자극적인 소재 이면에는 학대 생존자가 감당해야 하는 정서적 대가를 냉소적이면서도 뼈아프게 직시하는 서사가 숨죽이고 있다.

이 모든 팍팍한 현실의 끝자락에는 결국 ‘환상의 세계’가 입을 벌리고 기다린다. 베로니카 로스의 『Seek the Traitor’s Son』은 샤갈의 몽환적인 판타지를 그대로 서사로 풀어낸 듯하다. 군 수색 구조대원 엘레지가 예언자들로부터 탈루사르 제국과 악명 높은 라바 장군에 맞서 전쟁을 이끌 운명이라는 신탁을 받으며 일상이 송두리째 뒤집힌다. 불확실한 승패의 갈림길 속에서도 피어오르는 로맨스가 개인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얄궂은 설정은 끝없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내년 2월 28일까지 이어지는 샤갈 전시는 매일 2회씩 진행되는 도슨트 해설과 더불어, 주말마다 김찬용, 심성아, 김기완, 박수현 등 전문 해설사들의 특강을 통해 작품의 층위를 한 겹씩 벗겨내며 관람객을 안내하고 있다. 그림 한 점의 안료와 붓 터치를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나, 타인의 삶이 통째로 녹아든 서평을 활자 단위로 씹어 삼키는 일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색채와 텍스트라는 서로 다른 도구를 빌렸을 뿐,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복잡다단한 세계를 온전히 소화해 내기 위한 처절하고도 근사한 발버둥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