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산업계, 특히 뷰티와 테크 분야에서 흥미로운 지각변동이 감지되고 있다. 전통의 강자들이 주춤하는 사이, 혁신적인 기술과 마케팅으로 무장한 신흥 기업이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1988년생, 올해 36세의 김병훈 에이피알(APR) 대표가 있다.
블룸버그와 비즈니스 인사이더 등 주요 외신은 최근 그를 “카일리 제너도 반하게 만든 한국의 새로운 밀레니얼 뷰티 억만장자”로 집중 조명했다. 에이피알의 지분 31%를 보유한 그의 지분 가치는 약 13억 달러(한화 약 1조 8000억 원)에 달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에이피알이 상장 1년 4개월 만에 국내 뷰티 업계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LG생활건강의 시가총액을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지난달 23일 기준, 에이피알은 시가총액 6조 2126억 원을 기록하며 5조 원대에 머무른 LG생활건강을 추월했고, 부동의 1위인 아모레퍼시픽의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최근 1년간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의 주가가 각각 12%, 10% 하락하는 동안 에이피알은 무려 171% 폭등하며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블루오션은 죽은 시장이다”: 철저한 시장 분석과 잇단 실패가 준 교훈
혜성처럼 등장한 억만장자 김 대표의 성공 뒤에는 뼈아픈 실패와 남다른 통찰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부친이 사내 정치적인 이유로 실직하며 2년여간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내 운명을 남에게 맡기지 않겠다’며 창업을 결심했다.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시절부터 여러 스타트업에 도전했으나 초기 성적표는 처참했다.
그는 당시의 실패를 통해 “블루오션은 사실상 수요가 없어 비어 있는 ‘데드오션(Dead Ocean)’일 가능성이 높다”는 역설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그는 소비자의 니즈가 확실한 ‘레드오션’ 시장인 화장품과 패션 분야로 눈을 돌렸다. 광고 대행업을 하며 쌓은 감각을 바탕으로 직접 제품 개발에 뛰어들었고, 2014년 에이프릴스킨을 시작으로 2021년에는 뷰티 디바이스 브랜드 메디큐브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글로벌 MZ세대를 사로잡은 ‘뷰티 테크’ 전략
에이피알의 폭발적인 성장 동력은 철저한 ‘세대 공략’과 ‘기술력’의 결합이다. 김 대표는 현재를 문화 차이보다 세대 차이가 더 크게 작용하는 시대로 정의했다. 한국의 20대와 영국의 20대가 틱톡(TikTok)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트렌드를 공유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 전략은 적중했다. 헤일리 비버, 킴 카다시안 등 글로벌 셀럽들이 메디큐브의 ‘에이지알’ 기기를 사용하는 모습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지며 폭발적인 입소문을 탔다. 그러나 단순한 마케팅 승리는 아니었다. 여의도 투자업계 관계자들이 직접 제품을 써보고 투자를 결정할 정도로 제품력이 뒷받침되었다. 집에서 사용하는 화장품과 호환이 가능하고, 사용 후 관리가 간편하다는 실용성은 기존 고가 뷰티 기기들의 한계를 뛰어넘은 혁신으로 평가받는다. 김 대표는 최근 성수동 아크로서울포레스트 펜트하우스를 290억 원에 매입하며 신흥 부호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LG그룹의 또 다른 혁신: 뷰티를 넘어 미래 모빌리티로
한편, 뷰티 계열사인 LG생활건강이 신흥 강자의 거센 도전을 받는 동안, 그룹의 주력인 LG전자는 미래 기술의 최전선인 모빌리티 분야에서 초격차 기술을 선보이며 반격에 나서고 있다. LG전자는 다가오는 ‘CES 2026’에서 퀄컴 테크놀로지와의 협업을 통해 개발한 차세대 ‘AI 캐빈 플랫폼(AI Cabin Platform)’을 공개할 예정이다.
LG전자의 이번 혁신은 단순한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의 개선을 넘어선다. 기존의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을 넘어, 인공지능이 차량의 모든 것을 정의하는 ‘AIDV(AI-Defined Vehicle)’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다. 퀄컴의 고성능 ‘스냅드래곤 콕핏 엘리트’를 기반으로 구동되는 이 플랫폼은 외부 서버와의 통신 없이 차량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AI 연산을 수행하는 ‘온디바이스(On-device) AI’ 기술을 핵심으로 한다. 이는 클라우드 의존도를 낮춰 보안성을 강화하고, 데이터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여준다.
생성형 AI가 만드는 운전자 맞춤형 경험
LG전자가 선보일 AI 캐빈 플랫폼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언어모델(LLM)과 비전언어모델(VLM) 등 최신 생성형 AI 기술의 접목이다. 차량 내외부 카메라가 운전자의 상태와 주변 환경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상황에 맞는 조언과 기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운전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끼어들기 차량이 감지되면 “전방에 차량이 진입 중입니다. 주의해서 운전하세요”라고 경고하는 식이다.
단순한 안전 기능을 넘어 감성적인 영역까지 케어한다. 눈 내리는 저녁, 운전자가 음악을 듣고 있다면 AI가 이를 인식해 디스플레이 배경을 눈 내리는 풍경으로 바꾸고, “눈 오는 밤 분위기에 맞는 겨울 노래를 추천해 드릴까요?”라고 먼저 제안하기도 한다. 은석현 LG전자 VS사업본부장은 “LG전자의 AI 캐빈 플랫폼은 운전자를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모빌리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뷰티 시장에서는 30대 창업가가 기존의 틀을 깨는 혁신으로 LG 계열사를 위협하고 있지만, LG전자는 또 다른 영역에서 글로벌 파트너와의 협업을 통해 미래 기술의 표준을 정립해 나가고 있다. 한국 산업계는 지금, 패기 넘치는 신흥 억만장자의 ‘파괴적 혁신’과 전통 대기업의 ‘기술적 진화’가 공존하며 역동적인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다.